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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장 일상
어느 세미나를 다녀와서...
드와이트 리먼 무디는 별로 인기 없는 배경, 즉 뉴잉글런드의 작은 농촌 출신이었다. 1837년 소작농이자 석수의 다섯째 아들로 태어났으며, 4살 되던 해 아버지가 돌아가셔서 어머니와 8명의 아이들은 아주 가난하게성장했다. 초등교육밖에 받지못했지만 그는 근육질의 탄탄한 체구에 열심히 노력하며 야심있고 상당히 재미있는 사람이었다.
시카고로 이주하여 제화점에 취직한 그는 이러한 성격과 직업의식으로 일약 백만장자가 되었다. 그러나 무디는 곧 시카고의 빈민가에 사는 거친 소년들과 소녀들을 대상으로 하는 기독교 사역에 심혈을 기울이기 시작하였다. 부족한 교육에도 불구하고 그는 성경을 살아있는 말씀으로 증거하는 값진 은사를 발전시켰다. 불신영혼을 구원하려는 무디의 열망은 너무도 강했으며 무보수로 어린이들을 위한 선교와 새 YMCA를 운영하기 위하여 자신의 사업을 포기하기도 하였다.
1870년 그는 평생의 사역자이자 동역자인 생키와의 운명적인 만남을 통해 하나님 사역을 위한 완전한 구도를 갖게 되었다. 1872년 시카고 화재로 그가 건설한 모든 것이 파괴되었지만 그는 좌절하지 않았다. 오히려 영국과 미국을 넘나들며 가진 그의 전도집회는 그 전역을 흔들곤 하였다.
그는 학식보다 경험이 녹녹히 녹아있는 재담꾼으로 사람들의 이목을 집중시켰다. 영어는 종종 문법이 틀리기도 하고 설교 원고는 철자와 문법이 틀리기도 했다. 그러나 그리스도를 위해 결단을 촉구하는 그의 강한 메시지와 성령 충만한 집회는 어느 것보다 강하고 능력이 있었다. 그는 복음성가와 독창곡으로 인한 방대한 매출을 두 개의 학교와 선교를 위해 모두 헌금했으며, 1886년에는 시카고에 무디 성경학교를 설립하여 직업 기독교 사역자와 선교를 위한 헌신자들을 훈련시켰다.
무디는 단순히 그의 이름을 D.L.무디라고 서명하고 결코 목사안수를 받지 않았다. 그는 단지 평범한 무디, 혹은 부흥사 무디로 불리길 원했다. 결코 미국과 영국을 넘어 전도여행을 하지 않았지만 학생자원 단체와 해외 선교를 위한 끊임없는 독려를 통해 기독교 확장에 큰 영향을 주었다.
사람들은 그의 학식보다 경험이 풍부한 농담때문에 그를 더 잘 기억하였다. 무디의 정식 학교교육은 고작 5년 정도다. 그의 설교원고와 편지들을 검토해 본 사람이면 엉망인 철자법과 문법, 문자사용으로 겨우 읽을 수 있다는 사실에 공감하게 된다. 이런 그가 적극적으로 전도에 대한 용기를 가지게 된 계기는 무디의 주일 학교에서 소녀반을 가르치는 한 선생의 도움 요청으로부터 시작된게 아닌가한다. 폐출혈로 죽음을 앞둔 그 선생은 맡고 있던 소녀들을 하나하나 개종시키는 데에 무디의 도움을 원했다. 이 일 이후 무디도 자신의 사업을 버리고 하나님의 일에 전념할 수 있도록 인도받았다고 고백하고 있는 것이다.
이상은 다른 사이트에서 따온 글이다.
그리고 내가 알고 있는 무디선생님에 대한 일화가 하나 더 있다.
무디선생님이 어느 교회에서 설교를 하고 있었다.
그 교회에는 신앙이 깊은 목회자와 신도 그리고 역시 믿음이 깊은 어느 기자가 선생을 취재하러
나와 있었다.
무디선생님은 여느때처럼 잘 하지 못하는 영어로 그 교회안의 신도들을 감동시키는 동안
그 기자는 문법이 몇개나 틀리는 지를 세어가기 시작했다.
설교가 끝나고 많은 사람들이 감동을 받고 무디선생님과 인사하는 동안, 그 기자는 선생님곁에
다가가서 이렇게 말했다.
- 선생님은 설교하는 동안 문법이 몇번 틀렸는 지 알고 계십니까?
그러자 무디선생님은 그 기자에게 이렇게 말했다.
- 나는 비록 잘하지 못하는 영어로 많은 사람에게 감동을 주었지만 당신은 잘하는 영어로 몇사람이나
감동을 주었습니까?
어제는 내 인생에서 손가락안에 드는 힘든 날이었다.
아마도 앞으로 어지간한 시련에는 꿈쩍도 안할 것같다는 생각이 든다.
우리네 속담에도 여든 먹은 사람이 세살먹은 아이에게 배운다는 속담이 있다.
학문은 따지는 재미도 있지만 때에 따라 귀를 열고 들어주는 여유도 필요하지 않을까 생각한다.
또한 학문은 자유로워야 한다고 생각한다.
다른 유명한 사람이 그랬다고 해서 생각을 닫아버리면 더이상 발전은 기대할 수 없다.
나는 어느 세미나모임에 내 이야기를 하러갔다가 문법이 틀릴 때마다 지적을 받았으며,
결국 하려고 했던 이야기를 조금 밖에 하지 못한 채 아쉬움을 남기고 자리를 떠났다.
시카고로 이주하여 제화점에 취직한 그는 이러한 성격과 직업의식으로 일약 백만장자가 되었다. 그러나 무디는 곧 시카고의 빈민가에 사는 거친 소년들과 소녀들을 대상으로 하는 기독교 사역에 심혈을 기울이기 시작하였다. 부족한 교육에도 불구하고 그는 성경을 살아있는 말씀으로 증거하는 값진 은사를 발전시켰다. 불신영혼을 구원하려는 무디의 열망은 너무도 강했으며 무보수로 어린이들을 위한 선교와 새 YMCA를 운영하기 위하여 자신의 사업을 포기하기도 하였다.
1870년 그는 평생의 사역자이자 동역자인 생키와의 운명적인 만남을 통해 하나님 사역을 위한 완전한 구도를 갖게 되었다. 1872년 시카고 화재로 그가 건설한 모든 것이 파괴되었지만 그는 좌절하지 않았다. 오히려 영국과 미국을 넘나들며 가진 그의 전도집회는 그 전역을 흔들곤 하였다.
그는 학식보다 경험이 녹녹히 녹아있는 재담꾼으로 사람들의 이목을 집중시켰다. 영어는 종종 문법이 틀리기도 하고 설교 원고는 철자와 문법이 틀리기도 했다. 그러나 그리스도를 위해 결단을 촉구하는 그의 강한 메시지와 성령 충만한 집회는 어느 것보다 강하고 능력이 있었다. 그는 복음성가와 독창곡으로 인한 방대한 매출을 두 개의 학교와 선교를 위해 모두 헌금했으며, 1886년에는 시카고에 무디 성경학교를 설립하여 직업 기독교 사역자와 선교를 위한 헌신자들을 훈련시켰다.
무디는 단순히 그의 이름을 D.L.무디라고 서명하고 결코 목사안수를 받지 않았다. 그는 단지 평범한 무디, 혹은 부흥사 무디로 불리길 원했다. 결코 미국과 영국을 넘어 전도여행을 하지 않았지만 학생자원 단체와 해외 선교를 위한 끊임없는 독려를 통해 기독교 확장에 큰 영향을 주었다.
사람들은 그의 학식보다 경험이 풍부한 농담때문에 그를 더 잘 기억하였다. 무디의 정식 학교교육은 고작 5년 정도다. 그의 설교원고와 편지들을 검토해 본 사람이면 엉망인 철자법과 문법, 문자사용으로 겨우 읽을 수 있다는 사실에 공감하게 된다. 이런 그가 적극적으로 전도에 대한 용기를 가지게 된 계기는 무디의 주일 학교에서 소녀반을 가르치는 한 선생의 도움 요청으로부터 시작된게 아닌가한다. 폐출혈로 죽음을 앞둔 그 선생은 맡고 있던 소녀들을 하나하나 개종시키는 데에 무디의 도움을 원했다. 이 일 이후 무디도 자신의 사업을 버리고 하나님의 일에 전념할 수 있도록 인도받았다고 고백하고 있는 것이다.
이상은 다른 사이트에서 따온 글이다.
그리고 내가 알고 있는 무디선생님에 대한 일화가 하나 더 있다.
무디선생님이 어느 교회에서 설교를 하고 있었다.
그 교회에는 신앙이 깊은 목회자와 신도 그리고 역시 믿음이 깊은 어느 기자가 선생을 취재하러
나와 있었다.
무디선생님은 여느때처럼 잘 하지 못하는 영어로 그 교회안의 신도들을 감동시키는 동안
그 기자는 문법이 몇개나 틀리는 지를 세어가기 시작했다.
설교가 끝나고 많은 사람들이 감동을 받고 무디선생님과 인사하는 동안, 그 기자는 선생님곁에
다가가서 이렇게 말했다.
- 선생님은 설교하는 동안 문법이 몇번 틀렸는 지 알고 계십니까?
그러자 무디선생님은 그 기자에게 이렇게 말했다.
- 나는 비록 잘하지 못하는 영어로 많은 사람에게 감동을 주었지만 당신은 잘하는 영어로 몇사람이나
감동을 주었습니까?
어제는 내 인생에서 손가락안에 드는 힘든 날이었다.
아마도 앞으로 어지간한 시련에는 꿈쩍도 안할 것같다는 생각이 든다.
우리네 속담에도 여든 먹은 사람이 세살먹은 아이에게 배운다는 속담이 있다.
학문은 따지는 재미도 있지만 때에 따라 귀를 열고 들어주는 여유도 필요하지 않을까 생각한다.
또한 학문은 자유로워야 한다고 생각한다.
다른 유명한 사람이 그랬다고 해서 생각을 닫아버리면 더이상 발전은 기대할 수 없다.
나는 어느 세미나모임에 내 이야기를 하러갔다가 문법이 틀릴 때마다 지적을 받았으며,
결국 하려고 했던 이야기를 조금 밖에 하지 못한 채 아쉬움을 남기고 자리를 떠났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