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아카이브로 돌아가기
원장 일상
아, 옛날이여! - 양손을 다 쓰는 사연
이 글을 적으면서 우선 경희대 9회 동창생여러분들과 나를 위해 힘써 주신 몇몇 교수님들께 감사드린다.
원래부터 양손잡이는 아니었다.
던지기나 젓가락질은 왼손, 가위질이나 연필은 오른손으로 했었다.
그러다가 1980년에 벌어진 사건을 계기로 오른손이 할 일을 점차 왼손이 하기 시작하더니
이젠 공구를 이용한 모든 작업은 양손을 다 사용하며, 오히려 왼손이 편할 때도 있다.
1980년 내가 본과 4학년이 되면서 과대표로 뽑혔다. 그동안 학교를 얼마나 조용히 다녔었던지,
교수실을 돌며 인사하는 나를 보고 저런 학생이 있었는지 의아해하는 교수님도 계셨었다.
1980년대는 정말 암울한 시기였고 그 암울한 영향이 내게 직접적으로 와 닿았다. 나는 내 의지와는
상관없이 학교를 쉬게 되었고, 이 시기가 부모님께 가장 죄송스럽게 생각하는 시절이었다.
이듬해 3월 15일에 복학을 했다.
그리고 2주에 한명꼴로 내게 배정되는 신환(처음 내원한 환자분)으로 임상점수를 얻어야 했다.
*. 본과 4학년이 되면 선배로 부터 환자분들을 물려받는데 이런 환자를 구환이라고 한다.
학교측에서는 자기 환자가 아닌 다른 환자옆에서 observation할 때는 점수를 반만 주었다.
환자옆에 구경꾼이 필요이상으로 많다고 생각할 때는 담당원내생에게만 주고 나머지는
30분을 서있든 한시간을 서있든 점수를 주지 않았다. (지금 그때를 생각해도 가슴이 뛴다.)
2주에 한명꼴로 배정되는 환자분들만으로는 임상점수를 만회하기가 하늘의 별따기였다.
그래서 내가 직접 환자를 치료하는 방법을 택해서 겨우 점수를 얻어내기도 했다.
보철과점수는 내 형님애인을 데려다가 크라운을 하면서 따냈다.
옆에서 보철과교수님이 팔장을 끼고 보고 계시고 당시 레지던트 1년차였던 우이형선배가 석션을 잡았다.
치아를 삭제하려고 (한번도 안해보았었음) 떨리는 손으로 핸드피스를 잡는 나를 보고, 그 선배가
내 귀에 속삭였다. "교합면만 해! 교합면만..."
나는 열심히 교합면을 깎았다. 그러나 손에 힘이 빠진 탓인 지 시간이 지나도 치아는 내내 그 모양이었다.
하늘이 도왔을까? 교수님을 찾는 전화가 오면서 교수님이 자리를 잠시 뜬 순간 선배가 나를 툭치며
비키라더니 자기가 열심히 깎았다.
이형이형, 고마워요... 나는 평생 못잊어요.
교정과에서는 석고모형을 광내는 작업에 큰 점수가 걸려있었다.
지금 생각하면 뭣때문에 학생들이 이 짓을 했었는지 모르겠다.
교정환자를 데려오기가 불가능했던 나에게는 내 환자가 아닌 분을 치료할 때 구경하는 것으로
점수를 따야만 했다. 그리고 어쩌다가 내 앞으로 돌아온 석고모형은 그야말로 보물단지였다.
지금은 이름도 기억나지 않는 대학원 선배한분이 내게 모형을 주셨는데, 모델의 외형이 잘못 다듬어져서
잇몸형상부위가 조금 깎여나갔다.
그러나 나는 이를 아랑곳하지 않고 5일동안 조금이라도 쉬는 시간만 생기면 모델을 다듬고 광을 냈으며,
5일째엔 내 얼굴이 석고모형에 비추일 정도까지 되었다.
이젠 되었다싶어 모델을 당시 레지던트 1년차였던 선생님께 보여주었더니, 누가 이렇게 만들었냐면서
모델을 바닥에 내박쳤고, 모델은 소리를 내며 산산히 부서졌으며 내 점수는 허공으로 사라졌다.
23년이 지난 이야기를 글로 옮기는 이 순간에도 그때 일이 바로 어제 일 같다.
자못 흥분이 되어 잠깐 쉬다가 글을 적는다.
이 사건을 계기로 나는 교정과를 들어가기가 싫어졌고, 당시 60점을 넘어야 했었는데 나는 62점을
얻어서 겨우 통과되었다.
구강외과에서도 역시 발치를 직접하면서 점수를 얻어냈다. 발치할 때도 구강외과 교수님이 팔장을
끼고 구경하고 계셨는데, 나는 치과의사이신 아버님얼굴을 생각하면서 떨리는 손과 마음을 달래가며
사랑니발치는 물론 suture도 말끔하게 처리했다.
치주과에서는 스케일링에 큰 점수가 배정되어 있었고 나는 어떻게든 환자를 확보해야만 했었는데,
시험전날에 학생들이 병원을 비운 그 때 재수가 좋으면 스케일링환자를 만날 수도 있었다.
몇월이었는지는 기억나지 않지만 내일이 시험인 날이었고 그날도 학생들은 병원을 비웠으며,
전날 무슨 꿈을 꾸었는지 그날 오후 나는 스케일링 3건을 하게 되었다.
스케일링을 하는 동안 여기에서도 또 다른 교수님이 나를 관찰하고 계셨고, 나는 그 교수님이 요구하는
대로 팔목을 쓰지 않고 어깨를 사용하고, 또 오른손만으로 3명을 치료했고 그날로 팔이 이상해졌다.
그 뒤로 손을 조금만 움직여도 어깨가 시큰거렸고 이 느낌은 약 6년이상 지속되었다.
이때부터 나는 조금씩 왼손을 사용하기 시작했으며 지금은 왼손으로 prep.도 한다.
원래부터 양손잡이는 아니었다.
던지기나 젓가락질은 왼손, 가위질이나 연필은 오른손으로 했었다.
그러다가 1980년에 벌어진 사건을 계기로 오른손이 할 일을 점차 왼손이 하기 시작하더니
이젠 공구를 이용한 모든 작업은 양손을 다 사용하며, 오히려 왼손이 편할 때도 있다.
1980년 내가 본과 4학년이 되면서 과대표로 뽑혔다. 그동안 학교를 얼마나 조용히 다녔었던지,
교수실을 돌며 인사하는 나를 보고 저런 학생이 있었는지 의아해하는 교수님도 계셨었다.
1980년대는 정말 암울한 시기였고 그 암울한 영향이 내게 직접적으로 와 닿았다. 나는 내 의지와는
상관없이 학교를 쉬게 되었고, 이 시기가 부모님께 가장 죄송스럽게 생각하는 시절이었다.
이듬해 3월 15일에 복학을 했다.
그리고 2주에 한명꼴로 내게 배정되는 신환(처음 내원한 환자분)으로 임상점수를 얻어야 했다.
*. 본과 4학년이 되면 선배로 부터 환자분들을 물려받는데 이런 환자를 구환이라고 한다.
학교측에서는 자기 환자가 아닌 다른 환자옆에서 observation할 때는 점수를 반만 주었다.
환자옆에 구경꾼이 필요이상으로 많다고 생각할 때는 담당원내생에게만 주고 나머지는
30분을 서있든 한시간을 서있든 점수를 주지 않았다. (지금 그때를 생각해도 가슴이 뛴다.)
2주에 한명꼴로 배정되는 환자분들만으로는 임상점수를 만회하기가 하늘의 별따기였다.
그래서 내가 직접 환자를 치료하는 방법을 택해서 겨우 점수를 얻어내기도 했다.
보철과점수는 내 형님애인을 데려다가 크라운을 하면서 따냈다.
옆에서 보철과교수님이 팔장을 끼고 보고 계시고 당시 레지던트 1년차였던 우이형선배가 석션을 잡았다.
치아를 삭제하려고 (한번도 안해보았었음) 떨리는 손으로 핸드피스를 잡는 나를 보고, 그 선배가
내 귀에 속삭였다. "교합면만 해! 교합면만..."
나는 열심히 교합면을 깎았다. 그러나 손에 힘이 빠진 탓인 지 시간이 지나도 치아는 내내 그 모양이었다.
하늘이 도왔을까? 교수님을 찾는 전화가 오면서 교수님이 자리를 잠시 뜬 순간 선배가 나를 툭치며
비키라더니 자기가 열심히 깎았다.
이형이형, 고마워요... 나는 평생 못잊어요.
교정과에서는 석고모형을 광내는 작업에 큰 점수가 걸려있었다.
지금 생각하면 뭣때문에 학생들이 이 짓을 했었는지 모르겠다.
교정환자를 데려오기가 불가능했던 나에게는 내 환자가 아닌 분을 치료할 때 구경하는 것으로
점수를 따야만 했다. 그리고 어쩌다가 내 앞으로 돌아온 석고모형은 그야말로 보물단지였다.
지금은 이름도 기억나지 않는 대학원 선배한분이 내게 모형을 주셨는데, 모델의 외형이 잘못 다듬어져서
잇몸형상부위가 조금 깎여나갔다.
그러나 나는 이를 아랑곳하지 않고 5일동안 조금이라도 쉬는 시간만 생기면 모델을 다듬고 광을 냈으며,
5일째엔 내 얼굴이 석고모형에 비추일 정도까지 되었다.
이젠 되었다싶어 모델을 당시 레지던트 1년차였던 선생님께 보여주었더니, 누가 이렇게 만들었냐면서
모델을 바닥에 내박쳤고, 모델은 소리를 내며 산산히 부서졌으며 내 점수는 허공으로 사라졌다.
23년이 지난 이야기를 글로 옮기는 이 순간에도 그때 일이 바로 어제 일 같다.
자못 흥분이 되어 잠깐 쉬다가 글을 적는다.
이 사건을 계기로 나는 교정과를 들어가기가 싫어졌고, 당시 60점을 넘어야 했었는데 나는 62점을
얻어서 겨우 통과되었다.
구강외과에서도 역시 발치를 직접하면서 점수를 얻어냈다. 발치할 때도 구강외과 교수님이 팔장을
끼고 구경하고 계셨는데, 나는 치과의사이신 아버님얼굴을 생각하면서 떨리는 손과 마음을 달래가며
사랑니발치는 물론 suture도 말끔하게 처리했다.
치주과에서는 스케일링에 큰 점수가 배정되어 있었고 나는 어떻게든 환자를 확보해야만 했었는데,
시험전날에 학생들이 병원을 비운 그 때 재수가 좋으면 스케일링환자를 만날 수도 있었다.
몇월이었는지는 기억나지 않지만 내일이 시험인 날이었고 그날도 학생들은 병원을 비웠으며,
전날 무슨 꿈을 꾸었는지 그날 오후 나는 스케일링 3건을 하게 되었다.
스케일링을 하는 동안 여기에서도 또 다른 교수님이 나를 관찰하고 계셨고, 나는 그 교수님이 요구하는
대로 팔목을 쓰지 않고 어깨를 사용하고, 또 오른손만으로 3명을 치료했고 그날로 팔이 이상해졌다.
그 뒤로 손을 조금만 움직여도 어깨가 시큰거렸고 이 느낌은 약 6년이상 지속되었다.
이때부터 나는 조금씩 왼손을 사용하기 시작했으며 지금은 왼손으로 prep.도 한다.